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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2차 세계대전 독일 : 나치당과 히틀러의 집권

by 최상민수 2024.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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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국가들은 사상자 5000만에 사망자 1000만 발생하여엄청난 국가적인 손실을 입게 되었습니다. 당시 전쟁을 일으킨 독일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서 국민들은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전쟁의 패전과 엄청난 배상책임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승전국들은 패전국들을 대상으로 강화 조약을 맺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할 의도로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 하였습니다. 당시 독일의 국민 총 생산 기준으로 2년 치에 달하는 엄청남 배상금을 청구 하였으며 군대를 10만명으로 제한 하고 전차, 전함, 전투기를 자유롭게 생산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에 독일이 가지고 있던 해외 식민지를 승전국들이 나누었으며 라인란트 지방의 완전한 무장 해제, 알자스 로렌 지방의 할양, 폴란드의 독립 등 독일에게 과도한 압박을 가하였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의 폐혜와 개선

독일 국민들은 전쟁 피해와 더불어 엄청난 배상금을 내야 했기에 처참한 생활고를 겪어야 하였습니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나서 지폐가 휴지조각이 돼어 버리는 바람에 배상금을 제대로 갚을 수 없자 프랑스와 벨기에가 탱크를 끌고 와서 공업지대를 점령까지 하였습니다. 독일 내부적으로 불만이 커지는 것을 느낀 승전국들은 배상금을 차차 감면해 주고 어느정도 현실적인 규모로 축소하였으며 미국이 앞장서 거액의 차관을 지원해 주면서 독일 경제 재건에 나섰습니다.

세계경제 대공황과 나치당의 등장

미국의 도움으로 조금씩 경제를 회복해 나가던 독일은 1929년 경제대공황을 겪자 다시 경제가 무너지고 정치도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현재 독일 정치 세력들이 승전국들에 압박을 받아온 국민들로부터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고 극도로의 혼란 상황에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속칭 ‘나치당‘이 등장 하였습니다.
독일은 아무런 잘못 없다 독일인이 최고다 이 세상의 질서를 바꾸어여 한다는 주장을 하는 극우 정당이었던 나치당은 바이에른을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뮌헨 폭동

독일 서남부의 바이에른 주는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정치와 공산당에 대한 반발심이 강했으며 주 정부 요인들은 무솔리니를 모방하여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 하였습니다.
나치당을 비롯한 바이에른 내 우익단체들의 연합인 투쟁동맹은 이에 반발 주 정부 요인들을 협박하여 쿠테타를 강행할 것을 결의하고 1923년 11월 8일 정부 집회가 열리던 뮌헨의 한 맥주홀을 습격하였습니다. 쿠테타 시도는 하룻밤 만에 진압, 투쟁 동맹은 와해 되었으며 주동자들은 체포되거나 국외로 도망쳤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


폭동의 주동자였던 나치당 소속의 오스트리아 출신 청년 반역죄로 체포된 후 법정에서 늘어놓은 궤변에 재판을 담당한 판사 뿐만 아니라 독일 국민 전체가 귀를 기울이는 사건이 발생 하였습니다. 독일의 현재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바이에른 현지 여론의 압박으로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히틀러는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3개월만에 가석방 되었습니다. 뮌헨 폭동을 통해 스타가 되어 독일 중앙 정치에 진출 하게 된 히틀러는 독일이라는 국가는 오로지 독일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 해야 한다고 설파 하였습니다. 또한 히틀러는 전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반유대주의를 주요 당론 중 하나로 삼아 혐오를 부추겼으며 나치 청년조직과 돌격대가 기존 정치세력들에게 테러를 하고 지방 정부 등 사회 모든 분야를 나치 당원들이 장악하도록 하였습니다. 1929년 대공황을 기점으로 경제 파탄과 정부에 대한 정부에 대한 불신이 극심해지면서 1932년에는 나치당이 196석으로 제1당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1933년 히틀러가 총리로 취임 하였습니다.
총리가 된 히틀러는 삼권분립을 무너뜨리고 다른 정당을 모두 불법화 하여 일당 독재체제를 완성 하였습니다. 또한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배상금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라인란트 지방에 군대를 재배치 하였습니다. 굴욕적인 조약이라 여기 었던 독일인들은 히틀러에 열광 하였으며 히틀러는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통합시키면서 1934년 독일 민족의 유일한 영도자 ‘퓌러’에 등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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