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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도시 국가 아테네 평민 계층의 각성

by 최상민수 2024.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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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에 난민이 유입 되고 철기 농기구가 도입 되어서 전체적인 식량 생산량은 늘어 났지만 근본적으로 아테네 농지가 절대적으로  적어서 항상 식량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만성적인 식량 부족을 타계 하기 위하여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지역 도시 국가에서는 기원전 750년경부터 약 2세기 동안 해외 이주를 시작 하였습니다. 소아시아와 시칠리아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에 식민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형태는 폴리스 형태을 그대로 따랐으며 정치적으로 독립적이었습니다. 

 

교역으로 인한 경제력 상승 

 

해외의 식민 도시들은 농토가 넓고 비옥하여 식량 생산량이  많아 아테네는 식민 도시들과 무역을 하게 됩니다. 

필요한 식량을 가져오는 대신 올리브, 포도를 식민도시에 수출하였으며 이를 이동 및 보관하기 위한 자연 스럽게 도기 생산이 발전 하게 됩니다. 이렇게 교역과 상공업이 발달하자 사회 전체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 되고 귀족이 아닌 평민 들도 부자가 나오기 시작 하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정치 의식 변화 

 

식민 도시와의 교역으로도 식량 수요을 감당 할 수 없었던 그리스 인들은 더 많은 영토를 얻기 위하여 수시로 정복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전에는 청동 갑옷과 비싼 말을 살 수 있었던 귀족 중심의 전쟁이었다면 보병 중심의 사람 숫자와 전술 중심의 전쟁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도기를 대량 생산하던 기술을 무기와 갑옷에 적용하여 예전에 비하여 대량 생산이 가능 해졌기에  전쟁 전술도 변화 하였습니다. 전쟁이 시적 되면 평민인 농민과 상인이 생업을 하다가 중무장 보병이 되어 전쟁에 동원 되어 국가를 위해 참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평민들이 귀족과 동일한 보병으로서 전쟁을 치르면서 평민들 의식 속에서  '권리'라는 관념이 싹트게 됩니다. 그리고 킬론이라는 사람이 외국의 군대를 끌고 와서 아테네의 독재자 참주가 되려 하였을 때에도 평민들의 힘으로 독재 정치를 막아내는 일도 이루어 냅니다. 

토지소유에 따른 경제적 차이

 

농민 중에는 소수의 자영농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귀족으로부터 농경지를 빌려 경작을 하는 소작농이었습니다. 

소작농은 한 해 생산량의 6분의 1 이상을 귀족에게 지불 해야 했는데 높은 소작료 때문에 가난한 소작농은 충분히 식량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농지를 빌리는 것 조차 불가능 한 이들은 식량이 없으면 귀족에 연명하여 살다가 귀족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극단적인 사회 갈등과 법치의 시작

 

사회적 불평등과 귀족에 대한 특권에 대해 불만을 가진 평민들은 성문법을 요구 하게 됩니다. 오랜 세월 관행이나 관습니 굳어지 관습법을 따르고 있어 귀족 재파관들은 소송이 발생하면 언제나 귀족에 유리한 판결을 하였습니다. 경제력이나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법이 적용 되는 모순이 쌓이고 쌓이고 의식이 성장한 민중들은 명시적인 법을 제정 하기를 요구 하였으며  621년 최초로 성문법이 제정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귀족들도 성문법을 찬성 하였는데 귀족들간의 갈등을 해결하는데 관습법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으며 킬론의 쿠테타 발생 시에 민중들의 힘을 보았기에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성문법을 찬성 하였습니다.민중의 요구와 귀족의 필요에 의해 사법 분야를 담당하던 아르콘 중 한 명인 드라콘이 구전 되던 법률을 성문화 하였고 이른바 드라콘 법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성문법 제정으로 인하여 법률의 자의적인 해석과 고무줄 판결을 막고 법에 의한 통치가 시작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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