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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고대 그리스 국가 스파르타의 기원

by 최상민수 2024.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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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는 국민 전체가 ‘검소’, ‘절제’, ‘희생’의 가치를 가지고 생활 하는 굉장히 보기 드문 국가 였습니다. 스파르타는 극단적인 병영국가 개인의 특성을 무시하는 끔찍한 국가라는 이미지가 있는 반면 일부는 이러한 국가 모델을 신봉하기도 하였습니다.  플라톤은 이상국가의 모델을 스파르타에서 찾았으며 고대 로마인들은 자신들을 스파르타와 같은 혈통이라 주장 하였으며 토마스 무어는 이상국가란 뜻의 말을 ‘유토피아’를 스파르타를 염두 하고 만들었습니다.

 

스파르타 폐쇄적인 문화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하였습니다. 청동기 시절 부터 사람이 모여서 살기 시작 하였고 비옥한 토지와 평야의 중남부 지역에 정착민들이 점차 늘어나 사회 발전을 하였고 미케네 문명을 꽃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200년 철기로 무장한 도리아인의 남하와 바다민족의 침략으로 멸망하였습니다. 남하한 도리아인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정착 히였고 에우로타스 강을 따라 평원이 펼쳐진 비옥한 땅에 도시 국가가 탄생 하니 그것이 바로 스파르타 였습니다. 스파르타는 라케다이몬의 부인 ‘스파르테’를 도리아 식으로 부르는 말 이었으며 척박한 땅에 세워진 다른 폴리스와 달리 비옥한 평야를 가지고 있어 자급 자족이 가능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외부와 교류의 필요성이 적었기 때문에 폐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더 발전 된 문명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메세니아 정복과 농노 제도의 시작


기원전 8세기 중엽 부터는 스파르타는 점점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스파르타도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인구가 늘어나서 토지 부족 문제가 발생 하였습니다. 다른점은 해외 식민 도시를 개척 했던 아테네와 달리 바로 이웃국가 메세니아를 침략 하였는데 파미소스 강가 근처에 비옥한 평야가 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원전 743년 1차 메세니아 전쟁이 일어나서 20년간 전투를 벌이다가 메세니아를 완전히 복속 시켰습니다. 메세니아인들은 스파르타의 노예와 같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이 때 부터 스파르타 특유의 계급 체계가 형성 되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