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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바빌론의 타락과 신바빌로니아 멸망

by 최상민수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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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의 군국주의 체제가 사라지고 신바빌로니아가 다시 건국하자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 졌습니다. 왕들은 자신의 군사적 업적을 자랑하기보다 ‘신들의 사랑을 받은 자’ 라는 칭호를 더욱 좋아했고 신전을 중심의 사회가 구축 되었습니다.

물질적 쾌락주의에 빠진 사회

신바빌로니아에는 1000개가 넘는 신전이 존재 하여 수많은 신들을 숭배 하였으며 물질적이고 육체적 향락을 추구 하였습니다. 남성 중심의 쾌락적인 관습이 모든 여성들에게 강요 되었으며 이슈타르 신전에서 성관계가 이루어 졌습니다. 전쟁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쾌락에 빠져있는 바빌론을 야훼가 그들의 죄악을 벌하려고 정한 천벌의 장소로 여겼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죽음과 바빌론의 멸망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바빌론을 세계의 중심도시로 만드는데 성공 하였지만 그의 죽음으로 부터 급격하게 쇠락 하게 됩니다. 아들 아멜 마르두크가 즉위 하였지만 2년 만에 매형 네르갈 샤르 유수르에게 폐위를 당합니다. 하지만 왕으로 오르지 얼마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도 9개월만에 쿠테타로 암살 당합니다.  쿠테타로 왕웨에 오르게 된 나보니두스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마르두크 신이 아닌 달의 신을 추종 하였습니다. 이는 바빌론 주신 마르두크를 등한 하게 되어 기존 사제 계급과의 갈등을 불러 일어 켰습니다. 마르두크 사제들은 신전 중심의 사회 경제가 발달 된 바빌론에서 달의 신 신전에 재건에 몰두 하는 왕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바보니두스 왕은 사제 계급의 반발을 무시하고 아들 벨사자르에게 나라 일을 맡긴 채 아라비아 사막의 테이마로 이주해서 오랜 세월을 보냅니다.  왕이 바빌론에 없기에 마르두크를 모시는 신년 아키투 축제가 개최 되지 못하고 지배층인 왕자 벨사자르와 사제계급의 갈등으로 민심이 악화 되었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페르시아 키루스 2세의 침공과 신바빌로니아의 멸망

기원전 599년 이웃 국가 페르시아에서 키루스 2세가 왕위에 올라 메디와와 리디아를 공격하여 멸망 시켜 주변국 정세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에 대기근이 찾아오고 키루스 2세는 이를  기회 삼아 바빌론으로 쳐들어갔습니다. 키루스 2세의 업적을 기록한 키루스 실린더에 따르면 페르시아 군이 바빌론을 포위하자 그간 불만이 쌓여있던 바빌론 주민들이 성문을 열어 주었다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키루스 2세는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의 귀향을 허용하여 끌려갔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비로소 돌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페루스 2세는 신성한 도시로서 바빌론을 최대한 예우하여 페르시아 제국 치하에서도 특유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 나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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