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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마라톤 평원 전투 이후 10년 간의 평화

by 최상민수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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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제국 페르시아가 아테네군에게 마라톤 평원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한 원인은 1차 공격 때 20만명을 동원 한 것에 비해 2차 공격은 2만 5천명 밖에 되지 않았고 더군다 정예 병사는 전장에 없었고 배를 타고 아테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아테네 중무장 보병의 파괴력과 빠르게 돌격 하여 양쪽을 포위 공격 하는 전술적인 창의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전쟁의 승리가 민주주의 발전을 불러오다 

 

아테네는 마라톤 전사자 192명을 묻으며 이들을 전쟁 영웅으로 기렸고 스파르타 없이 대제국을 이겼다는 사실을 기념 하고 선정 하였습니다. 이후 중무장보병으로서 참전한 시민의 정치적 입지가 더욱 강화 되면서 아테네 민주정치는 더욱 발전을 하게 되고 약 10년간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군사 충돌은 발생 하지 않았습니다.

 

대규모 군선을 만들어 전쟁 준비를 하다


아테네는 마라톤 전투 이후 페르시아를 어떻게 외교적으로 상대 할 지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 논쟁 하였습니다. 온건파는 대화를 통해 페르시아와 좋은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강경파는 속국이 되지 않으려면 군사적인 준비를 꾸준히 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습니다. 강경파의 수장은 테미스토클레스 였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평민 출신이지만 민주주의 발전으로 493년 아테네 최고 행정관 아르콘으로 뽑히게 됩니다. 기원전 483년 아테네 남부 지역에서 엄청난 양의 은 광산이 발견 되어 국가적으로 엄청난 은을 어떻게 활용 해야 하는지 논쟁이 있을 때에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대규모 침략에 대비하고 향후 무역국가로서 해상을 제패 하기 위해 은을 사용해야 한다 주장 하였고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200척의 삼단 군선이 건조 되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


다리우스1세 사망 


패전의 소식을 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왕 다리우스 1세는 충격을 받고 더욱 더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직접 출진 하고자 하였습니다. 3년간 전쟁 준비를 하던 중 기원전 489년 속국인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 났습니다. 이 반란을 진압 하는 과정에서 다리우스 1세는 건강을 잃고 기원전 486년에 사망 합니다. 그렇게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아테네 원정의 과업이 대를 이어 진행 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