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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 관용의 정책

by 최상민수 2024.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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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1세는 여러 제도와 도로를 통해 넓은 제국을 공간적으로 통합하였으며 통화 시스템을 구축하여 경제적으로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제국을 경제적으로 한단계 발전 시킨 다리우스 1세는 키루스 2세의 관용 정치를 이어 받습니다.

관대한 이민족 정책

다리우스 1세는 수 많은 민족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던 점을 감안 하더라도 파격적으로 모든 언어와 종교를 허용합니다. 제국 내에서 사용 하는 공용 문서 즉, 행정 문서와 외교 문서에 페르시아어가 아니라 시리아 지방의 아람어를 채택합니다. 아람어는 당시 서아시아 국제언어 였기 때문에 이민족 사이에 정보 전달과 문화 교류가 원활하게 진행 되었습니다. 다른 피정복민족들에게 아람어나 페르시아어를 강요하지 않았기에 제국 내에는 이집트어, 페니키아어, 히브리어 등 수많은 언어가 공존 하였습니다. 또한 유대인과 그리스, 이집트 각자의 종교를 허락하고 신전 건설에 대한 금전적인 지원까지 해주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와 다양한 종교 공존

다리우스 1세는 조로아스터교의 신실한 신자였습니다. 조로아스터교가 창시된 시기는 기원전 1800년에서 640년 사이로 다양하게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조로아스터라는 예언자에 의해 창시 되었으며 그는 세상을 선과 빛의 신이자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과 어둠의 신 아흐리만의 대결이라는 이분법적인 관념을 설명 하였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을 중요시 하였으며 인간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 할 때 반드시 선과 악을 선택하게 되고 선한 편을 선택하도록 강조 하였습니다.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결국 선이 승리하고 모든 죽은 자와 산자가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딸라 심판을 받고 선한 자들은 천상의 행복을 누리고 악한 자들은 지옥의 불길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언 하였습니다.
당시 페르시아인들은 선을 상징하는 아후라 마즈다를 섬기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최후의 심판 때 천국으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왕들도 역시 조로아스터교을 굳게 믿었으며 제국 내에서 반안을 일으키는 세력을 악의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선의 이름으로 반란을 진압 하였습니다. 다만 반란을 일으키지 안고 평화적인 태도만 보인다면 그 어떤 종교도 방해 하거나 억압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방대한 제국 안에는 다양한 토착 종교와 관습이 평화롭게 공존 할 수 있었습니다.

 노예 없는 유급 노동 정책 

조로아스터교는 보편적인 도덕을 요구 하였고 다리우스 1세는 제국을 통합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활용하였습니다. 

 제국 곳곳에 조로아스터교 신전을 세워 포교 사업을 하였는데 신전을 건설 하는 과정도 그의 관용 정신이 활용 되었습니다. 노예제도를 금지한 키루스 2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노예가 아닌 전문성과 직능에 따라 급여를 주고 건설 사업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유급 노동 정책은 신전 뿐만 아니라 파괴 되었던 도시 수사를 재건하였으며 이집트에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를 건설 할 때 적용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화려한 도시  페르세폴리스를 새롭게 짓는데 대규모 유급 노동자를 동원하였습니다. 

새로운 종교적 수도로서 페르세폴리스를 만들기로 한 다리우스는 직접 위치를 지정 하였으며 제국의 영광을 기념하고 신년 종교 축제를 거행 하기 위해  최고의 건축가와 예술가, 장인들이 마을 이루어 살게 하였습니다. 다리우스 1세 부터 시작한 페르세폴리스 건축은 향후 150년간 후대 왕들에 의해 증축 되어 페르시아 제국을 상징하는 도시 건축으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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