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를 신봉하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러시아 사회의 만악의 근원인 봉건제와 전제군주제의 타도를 위해 완전 정반대 세력인 자유주의자들과 연대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성격이 전혀 달라 두 세력이 함께 혁명을 함께 하기 어려워 보였지만 두 세력이 뭉치게 되는 계기는 어리석고 무자비한 군주 차르였습니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개혁 요구
민중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무시하는 무자비한 차르에 불만이 쌓여 가던 중에 일본과 전쟁이 발발 하였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러시아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하자 민중들은 일개 아시아 국가에 패배하고 있다는 소식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여론이 점점 악화 되자 자유주의 상류층들은 이를 기회 삼아 의회 정치로의 개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하였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자유주의자들의 개혁 요구안을 핵심적인 내용을 교묘히 피해가면서 결의안을 받아들여 개혁은 실패 하였습니다.
피의 일요일
공장에서 노동 착취에 시달리면 노동자 조직은 가폰 신부를 중심으로 노동 개혁을 호소하는 시위를 감행합니다. 가폰 신부는 노동자들을 이끌고 겨울 궁전 앞 과장을 향했습니다. 과중한 노역 부담과 모욕적인 취급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대우를 요구 한 것에 불과 하였지만 진압을 맡은 군대는 남녀, 아이, 노인을 가리지 않고 총격을 가해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 하였습니다. 차르는 궁전에 없었고 자리를 비운 상태 이지만 이 사건은 차르에 대한 민중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차르는 힘든 점을 차르에게 직접 탄원하면 신의 대리자 차르께서 반드시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는 순수한 기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일말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함께 연합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농민 봉기와 전쟁의 패배
자유주의자들이 혁명 운동을 주도하여 지식인과 대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고 전국의 노동자들이 연대하였습니다. 농민들은 지주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저택에 불을 지르는 농민 봉기가 일어나 군대를 2,700여 차례나 파견 시켰는데 이러한 잦은 동원은 군인들의 불만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군인들 대부분은 징집된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부대 전체가 명령을 거부 하기도 하였고 사병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군대가 내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차르는 전쟁을 더이상 진행 할 수 없다고 판단 일본에 패배를 인정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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